[종의 기원] Sparkling Leftover Lemonade & Things You’ll Never Touch

Based on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2017)

♥ Sparkling Leftover Lemonade & Things You’ll Never Touch ♥ 

TEAM. 종의 기원
CAST. 코발트 워더링 블루 & 카나데 세이메이

SYNOPSIS 「불협화음의 포말」

「나였다면, 아마 당신으로 정했을 거야.」

에든버러의 이상적인 이민자 가정. 성공한 의사 부부와 순종적인 남매에게 드리우는 책임의 무게.
대가의 균형,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불운으로 완벽하게 붕괴한 일상 속에서, 남자는 선택해야 한다.

#1999. 07. 08

안내: 제목 및 각 소제목은 Mili의 곡 〈Lemonade〉에서 인용 및 변용하였습니다.
접기글을 펼쳐 전문 확인 부탁드립니다.

Sparkling Leftover Lemonade - 탄산이 남은 레몬에이드

이번 주말에요, 같이 레몬 사러 가주실 수 있나요?

엔도 카나데는 흠 많은 여자애다. 체구가 작아 어디서든 쉽게 밀려났고, 손을 가만 두는 법을 몰라 멀건 손톱 주변은 갈라진 상처와 굳은 피딱지로 가득했다. 손이 엉망인 주제에 손끝 야무진 것만은 퍽 쓸만하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으나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 때면 긴장에 떨림이 멎을 줄을 몰라 간단한 작업도 망쳐버리는 것이 카나데의 한계였다. 혹자는 그에게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박한 점을 지적하곤 했으나, 그조차도 카나데에게는 또 다른 결함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거울에 비춘 상에서 또 다른 결점을 찾아내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언어로 정의함이 하나의 일과로 굳어질 즈음, 카나데는 하나의 말을 습관처럼 혀 아래에 새겼다. ‘아마 안 될 거야’.

덜 익은 베이컨에서 스며나온 기름이 제 몫의 아침 식사를 더럽히고 있었다. 카나데는 대리석 아일랜드 식탁에 아무렇게나 내려진 플레이트가 주인의 의지와 무관히 하나의 투명한 표면을 이룬 것을 응시하다가, 설익은 당근과 표면이 균일하지 않게 그을린 프렌치 토스트로부터 겨우 시선을 뜯어냈다. 그적까지 어떤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카나데는 잠시 제 모난 구석에 목소리가 작고 가늘다는 것을 추가해야 좋을까, 생각하고 만다. 그리곤 여전히 잡념을 떨치지 못한 채로, 어깨에 힘을 주어 가까스로 반복한다. “엄마, 이번 주말에요.” 그제서야 아일랜드 너머의 부산스러운 소음이 멎는다. 엔도 리카는 요란한 소리를 내는 후드를 켜둔 채로, 뒤늦게 듣는 시늉을 하며 반문했다. “딸, 뭐라고?” 이어 따르는 것은 진부한 규격 내의 사과와 예의 짧은 핀잔이다. 카나데, 여기선 말이 잘 안 들려. 조금 기다려 줄 수도 있는 거잖니…. 그런 말들이 흐른다. 결국 이번에도 체념하는 것은 카나데다. 맥없는 어조가 말문을 텄다.

“이번 바자회에서 레몬에이드를 만들기로 했어요.”
“다른 애들은 스콘이나 파운드케이크를 구워오겠대요. 니나는 열쇠고리를 만들어 온다고 했구요. 그런 건 어려워도, 레몬에이드는 혼자서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억지로 떠맡은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엄마. 이번 주말에, 같이….”

조급하게 이어지던 말은, “카나데.” 한 번의 호명에 볼품없이 끊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짧게, 아, 하는 미련 섞인 소리가 추락하듯 떨어진다. 카나데는 리카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어떤 변명보다도 완곡하고, 동시에 완고한 거절이다. 하나 부탁을 끝맺지도 못했다는 것이, 그것이 더 볼 것도 없이 반려되었다는 사실은 유난스레 카나데를 슬프게 만들었다. 주방 후드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어색한 정적 사이로 핑계가 파고든다. “알잖아, 우린 주말에도 바쁘다는 거.”

카나데는 차마 대꾸하지 못할 말을 곱씹었다. ‘그럼요. 이미 안 될 줄로 알았어요.’

엔도 부부는 에든버러에서 가장 큰 병원의 흉부외과 전문의였고, 출신 의과대의 교수직을 겸임했다. 병원 홍보 팸플릿에는 유독 돋보일 크기로 백의 걸친 프로필 사진이 실렸으니, 유능함과 환자의 수요는 말할 것이 없었다. 책으로부터 나온 이들처럼 그린 듯 친절했기에 철 지난 유머를 들먹여도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그러니 두 사람은 대부분의 사회 표면서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었으나, 그게 좋은 부모의 자질을 갖췄다는 의미까지 가닿지는 못했다.

아마 엔도 카나데가, 그리고 집안의 첫째 되고 카나데의 오빠 역이 되는 엔도 슈헤이가 부모를 존경할지언정 진심으로 존중할 수 없었던 까닭은 이쯤에서 올 것이다. 부부에게 있어 이민자 신분으로 확실히 이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깥의 시선이 닿는 사회의 제 자리였지 가정의 단결은 아니었던 탓으로. 엔도 리카는 슈헤이가 12학년 문학 수업 과제로 제출했던 아가멤논과 아르테미스의 저주에 대한 레포트가 교외 분석 레포트 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엔도 다이스케라고 그리 다를 것은 없어, 그는 어째서 딸애가 나이에도 맞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세 번이나 빌려 읽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슈헤이의 교내 도서관 대출 카드 기록엔 그보다 더 많은 수가 기록되어 있었다는 점 역시 그랬다. 결국 소홀한 시간의 총량을 합치면 평생이 되어버리는 탓으로, 엔도 부부는 그들이 자리를 비운 평일 저녁에 그 애들이 무얼 했는지 영영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교류의 기회와 시기를 놓친 자녀에게 유대를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집안엔 늘 풍족함은 만연했으나 화목함은 부족한 기질이 있었다. 카나데는 진즉 거절에 익숙해져 있었고, 이날과 같은 실망의 날이 적었던 것 역시 아니다… 하지만 답잖게 다시금 속이 상하고 마는 것은 제 정신이 덜 여문 탓임이 분명하리라. 카나데는 실없이 본연의 존재 탓을 하고야 만다. 카나데는 종종 가족이, 혹은 가정으로 일컫는 것이 이렇게 표면적인 성질을 지닐 수밖에 없다면 제 플레이트를 더럽힌 기름처럼 닦아 사라지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것이 말끔한 해결책이 될 순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앎으로, 카나데는 서운한 감정을 아침 식사와 함께 쪼개어 제 속에 밀어 넣기로 결심한다. 거슬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자른 당근 조각을 목뒤로 넘기듯이. 씹어 삼키면 사라지는 게 감정이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아일랜드 식탁이 경계가 되어, 주방과 식탁 양면이 마주 본 채 정적에 잠긴다. 카나데가 입을 벙긋하지 않으면, 리카 역시 대꾸하지 않는 딸을 나무라지도, 미안함이 담긴 위로를 재차 건네지도 않는다. 여즉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슈헤이의 자리는 비어 있고, 한참이 지나서야 상석을 채운 다이스케가 “분위기는 또 왜 이래?” 괜한 말을 던진다.

꼭 기회라도 발견한 듯 리카의 대꾸가 틈을 잡는다. “카나데가 서운한가 봐요.” 학교에서 레몬이 필요하다는데. 아무래도 우린 바쁘니까. 그런 표현과 함께 시작하는 서술은 카나데의 대변보다는 리카의, 동시에 다이스케를 위한 변호가 되고 만다. 카나데의 서운함이 단순 레몬 한 봉지와 삼 킬로그램짜리 설탕 한 봉지에 달린 게 아니라는 걸 엔도 부부는 알아채지도, 알아줄 마음도 없는 눈치다. 질린 한숨과 고루한 밀고, 카나데는 그 사이에서 잠시 용의자가 된다. 죄명을 정한다면 「부모 마음을 몰라주는 불효자」 정도가 될까… 불운한 심정이 어디까지 자랐는지를 모르는 채, 다이스케가 카나데를 퍽 상냥하게 타이른다.

“속상할 수 있단 건 알아.”
“네가 학교에서 뭔갈 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도 처음인데. 뭐든 우리가 함께해 줄 수 없다고 한담 속이 상하겠지. 하지만 카나데, 우리가 같이 가 줄 수 없는 게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란 걸 알잖니. 물론 넌 아직 애고, 네 오빠보다도 한참 어리니까. 우린 널 지금보다 더 신경 써 주고 싶어.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우리도 마음이 불편해. 넌, 우린. 가족이니까.

카나데의 눈높이에선 제 부모가 통 자녀의 사정과 환경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들처럼 보였다. 가령 “카드를 챙겨 줄 테니까, 다음엔 같이 가 줄게.” 따위로 위로가 되리라 믿는 태도가 그랬다. 엔도 부부가 매사를 자차로 해결하는 사람이었던 탓에, 가까운 마트까진 도보로 삼십 분이 넘게 걸린다. 왕복으론 한 시간이 훌쩍 넘어갈 테고 여름 날씨에 여자애 혼자 레몬과 설탕을 혼자 들고 돌아오기엔 무리 되는 일뿐이다. 카나데는 두 사람이 그걸 잊은 걸까… 생각하며 침묵했다. 사람 가슴 여는 법엔 누구보다 박식하다지만, 속내 읽는 것은 심리의 분야이니 재능이 없는지도 모른다. 곧장 돌아오지 않는 대꾸에서야 다이스케는 저들 부부의 대처에 무언가 오류가 있었으리라 짐작한 기색이다. 그쯤 싸늘한 적막 사이로 계단을 아무렇게나 짓밟는, 그러나 가벼운 발소리가 파고든다. 불편함에 환기는 없다. 발소리의 주인이 슈헤이임을 모르는 이가 없어서.

곧장 이 지붕 아래서 남 눈치 주기엔 제일인 사람이 주방에 들이닥친다. 왼쪽 어깨엔 오래 쓴 백팩을 걸치고, 복사해 필기로 빼곡히 채워 넣은 학년말 시험 예상안이 오른손 가득 들려 있는 채다. 카나데의 오빠는, 슈헤이는 디플로마 수료가 코앞인 탓에 집안에선 아침 식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꾸지람을 피해 갈 유일한 면제권을 얻었다. 슈헤이는 얄팍한 면제권을 퍽 노력하게 활용했고, 홀로 분주한 날이면 지금처럼 부엌을 거쳐 뒷문으로 빠져나가 먼저 학교에 가버리곤 했다. 그건 ‘이상적인 가족’이 으레 나누는 아침 인사와 평화로운 식사 시간을 깨는 행위였지만, 엔도 부부에겐 그런 것보단 아들이 원하는 명문 대학에 합격하는 편이 자랑하기엔 좋을 테니 넘어가 주고 마는 것이다. 다정한 것보단 겉보기에 자랑스럽고 명민한 쪽이 남 보여주기엔 이상적이니까.

하나 그날따라 유난한 카나데의 침묵과 언뜻 깨달은 말실수가 신경에 쓰였던 탓인가, 하여 다이스케는 아들을 “슈헤이. 잠깐만.” 하는 고루하나 점잖은 톤의 호명으로 불러 세운다. 뒷문 문고리를 쥔 슈헤이가 부모를 본다기엔 꽤 불손하고 성가신 눈으로, 돌아본다. “…학교 늦었어요.”

그거야 알지. 평소보다 늦게 내려왔는데.
그럼 왜요. 
…….

잠이라도 설친 듯 피곤한 슈헤이의 눈가를 살핀 순간, 카나데는 속으로 다이스케가 하려는 말이 부디 제 생각과 일치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다만 카나데의 기원은 으레 이루어지지 않기 마련에, 예감은 빗나간 적이 많지 않은 흐름을 따라. “주말에 시간 좀 내 줘. 카나데가 레몬을 사야 한다는데. 넌 면허도 있으니까.” 우리 대신 다녀와 줘… 다이스케의 요청과 카나데의 예상은 궤를 완벽히 함께 하며 일치하고야 만다. 아침부터 세 번의 거절을 겪는 건 제아무리 거부에 익숙해진 저라도 버거우리라, 차라리 듣고 싶지 않다 생각하며 카나데가 눈을 내리 깐다. 답이 돌아오지 않는 문가가 더 표현할 법 없이 불길하다. 카나데에게 이곳에서 가장 큰 것은 제 숨소리만 같았다…….

“…너.” 슈헤이가 담담하게 부른다. 이 집에서 그가 ‘너’라 부를 법한 사람은.

“그건 왜 필요한데?” 여동생 하나가 전부다. 

뜻밖의 의도를 묻는 물음에 카나데가 고개를 든다. 잠 못 잔 파란 눈과 마주치면, 어쩐지 주눅이 들어서. 목소리는 안으로 기어든다. “레몬에이드를 만들기로 했어.” 그런 주제에 어디서 난 마음인지 모른 채로, 차라리 퇴짜를 맞는다면 직접 말하리라, 마음먹으며 묻는다.

“주말에. 이틀 중 아무 때나 상관 없어. 같이 레몬 사러 가 줄 수 있어?”

슈헤이가 문 옆에 걸린 차 키를 챙겨 들며 답한다. “……그래.”

그 기운 빠질 정도로 간결한 대꾸를 끝으로 나무로 된 주방 뒷문이 열렸다, 닫힌다. 잘 됐네. 혼자 안 가도 되겠다. 운전할 줄 아니까, 오빠한테 태워 달라고 해. 그런 말이 귓가에 뒤섞이는 것을 떨쳐내며, 카나데는 그 답을 두어 번 곱씹는다. 바자회에 준비할 레몬에이드에 대한 걱정은 저 뒷전으로 사라진다.

주말까진 나흘이다. 그깟 나흘이라면, 카나데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Things You’ll Never Touch - 당신은 돌아봐주지 않을,

엔도 슈헤이는 유선 전화기의 버튼을 누른다. 손에 들지 않고 그 옆에 대강 내려둔 수화기로 보건대 음성메시지를 귀담아들을 생각 없음이 분명하다. 당신 기다리는 목소리 있노라 깜박깜박 점멸하는 녹빛 등이며 간헐적으로 울리는 알림이 거슬렸을 뿐으로, 예상했듯 실제 남는 문장들은 시답잖은 것들이다. 「슈헤이, 괜찮아?」 이름만 아는 동급생을 지나, 「엔도 선생님, 부인 소식은 들었습니다. 정말 유감입니다.」 흔한 허울들. 지나친 관심이다.

타인의 불행은 들여다보기에 매력적인 요소다. 당장 닳도록 읽은 비극과 재생산되는 소문, 쏟아진 메시지들이 그 반증이다. 제 삶 비교하여 나아지는 것 하나 없음에도 위안을 얻는 까닭이야 이해할 수 없으나, 알량한 위선 세워 행복하다며 듯 웃는 낯짝 마주하는 것보다야 낫노라 납득 정도는 할 수 있다. 전자는 못 견디게 역겨우니까, 쥐어뜯고 싶을 만큼…. 벽에 슨 곰팡이 가리고자 네모반듯하게 붙여둔 벽지 끝을 들뜨도록 문지르며, 무기질적이고 기계적인 행위가 반복된다. 말이 끊기고 또 넘어간다. 그 움직임 잠시 멎는 것은 익숙하나 생경한 이름 탓이다.

「카나데, 나 니나야. 잘 있어?」 안부는 여전히 고루하고 짧다. 끝나기까지 수초도 걸리지 않고, 그가 여태 경멸하던 것과 다를 바 없으므로 기억에서 끄집어낼 것이 있다는 것만이 특기할 점이다. 슈헤이는 어렵지 않게 제 동생을 떠올린다. 정확히는 멋대로 뇌리를 스쳤다는 표현이 옳다.

주눅 들어 눈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늘 무언가에 쫓기듯이 구는 아이. 특별히 모나지 않았으나 형편없는 딸. 완벽을 뒤집어쓰기 위해서는 어설픈 부족함까지 꾸며내야 하는 법이고, 이 집의 어느 암묵 속에서 엔도 카나데는 그를 위한 장치다. 말라 죽지 않을 만큼의 관심, 그 이상의 간섭과 방관. 억울함에 악쓰거나 도망칠 의지는 애당초 거세당했으니 포기를 새기거나, 악착같이 매달리거나. 방법은 오로지 둘 남는다. 슈헤이와 카나데는 그 테두리 안에서 함께 자랐으며 다르게 컸다. 그것이 다른 하나의 탈락에 가까울지라도 슈헤이는 선택했고, 카나데는 끝내 무엇도 선택하지 못했다. 그뿐인 차이다.

엔도 부부는 끝까지 모르던 일이나, 두 사람의 인내는 충분히 길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자문할 수 있을 만큼은 떳떳하게 살았고, 불합리한 답에 반발하지 못할 만큼은 비굴하게 이어온 숨이다. 어쩌면 땅 딛고 선 것부터 옳지 않다는 양 울렁이는 감각, 별안간 무너지듯 힘 빠져 주저앉던 때 슈헤이는 인정하고야 만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을 뿐이라 따져 의미가 없음을. 무덤에 들어가면 못 할 말 있듯 이제 보답이란 기약 없음을 넘어 불가하다. 어쨌든 제 탓은 아니니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 있을 터다. 기운 세상이니 수긍하여 기울어 살겠노라고. 그럴 수순이라면.

그러니 죄 쏟아져 망해버리라지…. 후드득, 무언가 바닥을 구르는 둔탁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시선 돌아간다. 마른 레몬이 아무렇게나 발치 구르고 있다. 동행했으니 안다. 일전 카나데가 품에 넘치도록 산 것이다. 종이봉투에 대충 넣어진 채 냉장고 구석에 방치해두곤 누구도 살피지 않았던. 흠칫 놀란 기색 감돌다 제풀에 가라앉는 낯을 본다. 형체 있으니 주워 담기만 하면 될 것을 액체가 엎질러진 양 멀거니 바라만 보던 카나데가 쭈그려 앉아 손안에 과실 하나만을 쥔다. 한참을 매만진다.

엔도 카나데를 제외하고, 이 집에서 그런 것 – 그러니까, 바닥에 떨어진 쓸모없는 것 말이다. - 에 관심 두는 이는 없다. 슈헤이 역시 그렇다. 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자 이곳에 없다. 되지 않는 일을 바라고 상처받는 일은 먼 옛날 관두는 편이 나았다. 슈헤이가 이제껏 잘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던 듯 구는 것이나, 결국 부친에게 누구도 선택받지 못한 것처럼. 태어나길 자의를 박탈당하고, 죽음에 침통해 하지 않으며, 정의에 가까운 명제의 실행, 무고한 희생이 무고한 희생을 낳는 게 당연하게 된 것처럼.

카나데는 이윽고 레몬을 닦지도 않고 크게 베어 문다.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진다.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진다…. 날카로운 산미 탓인지, 저미는 설움 따위를 참는 탓인지는 알 수 없다. 시일이 오래 지나 흐르는 즙 없이 드러난 과육이 비틀린 채다. 그것이 멎은 심장처럼도 보였으므로, 레몬에이드 따위 영영 만들지 못하리라는 명제만이 뚜렷해진다. 함께 만들어줄 사람도, 마셔줄 사람도 없을 것이고… 딸애의 제안을 완곡하고 매몰차게 거절했던 여자도 없다. 일견 완벽해 보였던 엔도 가족 역시 그날 이후 박살났다.

죽을 이유 없던 사람들. 그런 탓에 죽어 마땅한 사람들. 그중 제 모친 떠올린 슈헤이는 내심 냉소한다. 엔도 다이스케는 가장 증오스러운 이였으나 이번에도 선택권을 손에 쥐고 있었고, 엔도 슈헤이는 적어도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으며, 비하자면 엔도 리카보다는 엔도 카나데가 나은 존재라 여겨지기에. 여동생은 적어도 그와 유사한 불행을 공유하고 있었다. 당장 같은 장소에서 호흡함이 거북하지 않은 까닭이고, 이 볼품없는 참사가 그나마 다행 되는 이유다.

버튼 누르는 사이의 공백이 길다. 때마침 귀를 어지럽히는 바이럴 마케팅의 조잡한 음에 슈헤이는 염증을 느끼며 전화를 끊는다. 모든 메시지를 확인하고자 했던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다. 신경질적으로 내려둔 수화기 소리에 카나데가 놀라 고개를 든다. 시선이 맞물리고,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눈동자가 당황스럽게 구른다. 지금 바닥을 뒹구는 레몬과 같이.

슈헤이는 그저 응시하다 입을 연다. 전파 거쳐 녹이 슨 것처럼 건조한 목소리로, 거리 좁힐 수 없는 어리석음에 대한 일말의 연민 담아.

어차피 못 쓰게 된 거, 다 버려. 넌 그런 걸 참 못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