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은최고의로맨스] 이카로스의 海

 

Based on Inception (2010)

♥ 이카로스의 海

TEAM. 추락은최고의로맨스
CAST. Dante Richter & Cyril Masefield (단테 리히터 & 시릴 메이스필드)

SYNOPSIS 「우리는 너무 높게 날았어. 그래서 떨어지고 만 거야.」

현실을 잊고, 꿈속으로 도망치고자 약물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섬나신 주사 한 번으로 싫은 일은 전부 잊고, 각자의 환상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전단이 전염병처럼 사회를 좀먹었다. 오랜만에 조우한 친구 역시, 파리한 낯으로 그런 꿈속에 빠져 있었다. 잠자리에 들어 보는 꿈은 고사하고, 현실의 희망조차 논해본 적 없는 사이. 그럼에도  〈누군가〉는 타인의 감옥에 뛰어든다. 다시 눈을 떴을 때─목적은 고사하고, 본질마저 잊어버리게 될 것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하지만 이런 건 역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어」

#2022. 08. 09

열람 시 주의사항: 상해, 살인, 약한 고어 표현. 접기글을 펼쳐 전문 확인 부탁드립니다.
일러스트 CM @johnzo__

1

커튼이 흔들린다. 흰 천 위로 나뭇잎 그림자가 레이스처럼 늘어진다. 탁자에 놓인 프리지아 꽃다발 사이에서, 건강하길 바란다는 문구가 인쇄된 카드가 떨어진다. 버드나무를 스치는 바람이 파도 소리를 낸다. 근처에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누군가는 생각했다. 사방이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넓은 방 가운데 작은 침대, 흰 시트에 모로 누워 눈을 뜨지도 않고 자신을 감싼 풍경을 둘러보았다. 무언가를 보겠다고 마음속으로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이미지가 뇌리에 다가와 박혔다. 벽 바깥은 온실이었다. 이름 모를 꽃과 나무가 상승시킨 지평선 너머는 희뿌연 반사광으로 막혀 있었다. 방 내부에도 크고 작은 화분들이 널렸고, 유리와 철, 금으로 이루어진 작은 가구와 조각상들이 탁 트인 공간에서 햇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겨울의 동백과 여름의 장미가 한데 피어난 덤불. 뒤섞인 계절. 공들여 관리하는 듯 시든 이파리 따위 한 장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눈으로 가장 먼저 살핀 것은 셔츠 소매의 커프스 버튼이었다. 붉은 보석이 녹아내리듯 빛났다. 아주 오래 이곳에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한순간의 착각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는 경위를 되짚기 전,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불안에 휩싸여, 순식간에 침대 밖으로 나섰다. 구두굽이 대리석 타일과 맞물려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그를 인위적이고 아름다운 유리 정원에 가두고, 깔끔한 옷차림을 시킨 이는 누구일까? 다행히도 자신의 얼굴은 떠올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의문과 막막한 감정이 증오로 치닫기도 전, 얼마 남지 않은 초처럼 사그라졌다. 끓는 물같이 분노하고 싶었으나 그의 근간을 구성하는 잔은 텅 빈 채였다. 질문하고 싶었으나 어디에도 불온한 실마리는 없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안정적이다. 천장에 달린 커다란 금속 모빌이 흔들릴 때마다 새의 지저귐이 들려온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높게 펼쳐져 있다. 그렇다면 더는 잃을 게 없다면 마음가짐으로, 천천히 유리 벽에 다가가 출구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잎이 넓은 관엽식물 뒤에서 작은 문고리를 발견했다. 날개 문양이 그려진 손잡이를 돌려 두 공간을 연결지은 순간,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가 방 안으로 드리워졌다. 발소리도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애초 안에서 밖이 모두 내다보이는 구조였으므로, 〈누군가〉는 마법처럼 갑자기 그곳에 나타났다고 밖엔 설명되지 않았다.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하자, 금이 간 채 얼어붙었던 호수가 드디어 깨지는 것처럼 〈나〉는 분리되었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서둘러 온 사람처럼 머리카락이나 옷에 공기가 스친 흔적이 남아있었다. 회색 눈동자는 긴장과 공포에 질리고, 부산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호흡만이 극도로 안정되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너 누구야?」 입을 떼자 목이 따끔거렸다. 
「단테,」 그는 장갑 낀 손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검은 가죽의 촉감이 차갑게 와닿았다.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돼……. 어떻게 들어온 거야? 지시를 받았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
「어디까지 기억하는데?」
「네가 직전에 말한 내 이름.」
「…차츰 떠오르겠지. 내가 알려주기 전에 네가 깨닫는 편이 나아.」
「제대로 설명해줘.」
「영원히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마지막 문장은 강하게 발음되었다. 네가 이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리 없다는 확신, 동의를 구하지도 않는 오만. 이해와 기대가 미묘하게 어긋난 채 부합된 요청.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도한 듯 웃었으나 기뻐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바깥으로 향했다. 미로처럼 얽힌 복도를 따라 수십 개의 문을 지나쳤다. 난잡한 길을 외우려 노력했지만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상대는 구조를 전부 파악한 듯 나아갔다. 간혹 다른 새장 속에서 타인의 모습을 발견했지만, 모두 침대 위 잠들어 있었다. 걷는 보폭이 점차 빨라져 뛰기 시작하자 숨이 차오르고, 입안에 단맛이 돌았다. 소매에 걸린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꽃잎이 떨어져 밟힌다.
당신은 누구인지, 어디로 데려가는지, 나를 알고 있는지, 외에도 수많은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확연히 대답하지 않았다. 화를 내고 돌아서기엔 너무 늦었다. 복잡한 미궁을 헤메다 굶어 죽는 길밖엔 남지 않을 것이다. 사고가 먼 방향으로 치우쳤다. 어쩌면……병원을 표방한 감옥 시설일지도 모른다. 범죄자들을 모아 영영 잠들어 있도록 설계한 인도적인 건물일지 모른다. 아둔하고 자기중심적인 발상이지만, 자신이 그런 죄를 저질렀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세계가 무너져내린 후 유일이 남은 쉘터라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뇌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급히 끌려갈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온실은 종말과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평화라는 단어를 건축한 것처럼,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고요했다. 

「미안해. 거의 다 왔어.」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그게 너를 쫓아올 테니까….」

삼십 분 정도는 쉬지 않고 뛰었을 것이다. 대화와 달리,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멈춰 섰다.
「그게 뭐길래….」
동시에 등 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상대의 기척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지친 기색과 달리, 여전히 죽은 듯 차분하게 서 있었다. 줄곧 그의 등을 따라 걷고 뛰었으므로 뒤에서 움직임을 느낄 일도 없었다. 질질 끄는 듯한 발걸음, 정확히는 열 명 이상의 구두와 옷자락이 바닥에 불규칙적으로 스치고 문질러지고 찢어지는 괴이한 음색이 서서히 다가왔다. 나를 쫓는 존재에 대한 사고. 그것을 읽듯 〈그것〉은 움직였다. 

「돌아보면 안 돼.」 나를 향해 돌아보며, 그가 말했다. 의식의 지저에서 어느 이야기가 꿈틀거렸다. 오르페우스의 잘못된 선택……. 이승은 아직 나의 시선 속에, 명계는 그가 내 어깨너머로 바라보는 곳에 있었다. 뜨거운 바람이 훅 끼쳤다.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잠깐 흩날리지만, 주변의 나뭇잎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자연스레, 소름 끼치는 감각이 전신을 타고 오르고 손발이 굳는다.
연이어 질겅질겅 짓씹는 소리가 몇 번 났다. 무언가 뺨을 스치고, 바닥에 떨어진다. 우리는 내려다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사람의 손가락이 짧게 잘린 채 널브러져 있었다. 검붉은 절단면으로부터 피가 흘러 타일의 틈을 채운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그는 내 팔을 붙잡고 강한 힘으로 당겼다. 하지만 늦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태고부터 존재한 꿈의 세계. 오직 사람의 심상만으로 이루어져 해저에 떨어진 마음의 결정체─악의로 변질된 순수한 탐구욕. 언어로 형용하기 어려운, 간악한 집념이
누군가의 입속으로 파고들었다.



2

The sun sets longer
Where I am from
Where dreams go to die…….

나는 오픈카 조수석에 구겨진 채 눈을 떴다. 왼쪽 다리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손을 뻗자 천으로 동여맨 상처가 만져지고, 차 바닥은 흘러나온 피로 흥건했다. 차체가 빠르게 나아감과 동시에, 서늘한 바람이 뜨거운 피부를 식힌다. 옆을 돌아보았다. 노을에 잠긴 상대의 얼굴을 훑어보면서, 천천히 떠오르는 기억에 사고를 맡겼다.


여름의 마지막 조각을 품은 10월, 우리는 그리니치 공원에 있었다. 호수 앞의 벤치에 걸터앉아 녹색 공기를 들이마셨다. 자판기 밀크티에서는 먼지 향이 났다. 수면에는 뒤집힌 정경이 담겼고, 파문이 일 때마다 햇빛이 산산조각났다. 포플러 나무가 상승시킨 지평선 너머로 천문대 건물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그런 안온 속에서,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라고, 시릴 메이스필드가 말했다.

신중함과 불안, 의지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으며 끝나지 않으리라는 믿음 아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음성은 언어로 나눈 적 없는 신뢰가 얼마나 얄팍하고 덧없는 것이었는지 통감 시켜 주겠다는 것처럼 확고했다. 만나자는 약속을 하기까지 주고받은 메일, 자전거를 몰아 도착한 공원, 흘러가게 둔 잡담 따위는 전부 기억 뒤편으로 밀려나 버린다. 창공을 큰 구름 하나가 덮는다. 그늘진 미소가 천천히 사라지더니, 주문을 외우듯

「이제 만날 수 없게 될 거야.」
「너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인들, 내 가족도 마찬가지야. 누군가 내 행방을 찾으면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 그렇게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고 대답해.」
「부탁이야, 단테.」
「오늘 대화도 잊어 줘.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부탁이야…….」

다시, 일광이 지면을 덮었다.


두 사람의 침묵 따위 세계의 끝은 아니라서, 어디선가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던 것 같다. 돌연 세상에서 사라지고자 행동하는 친구에게, 나는 어떻게 반응했던가. 아마 곧바로 받아들이지는 않았겠지만……통증이 회상을 방해했다. 뚫어지게 바라본 끝에 눈이 마주친다. 시릴은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는 지평선으로.

「네가, 출구 바로 앞에서 기절해서….」
「왜 그랬던 거야?」 나는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뭐가?」
「갑자기 만날 수 없다 그러고, 연락이 끊어지더니 …. 지금은,」
「사정이 있었어.」
「왜 내가 연관되는 상황인지는 설명해. 너,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네게 악의를 갖고 있거나, 속이려는 게 아냐.」
「…….」
「많이 아파? 지혈은 했는데……병원까지 데려다줄게. 네비게이터 봐, 행선지가 적혀 있지.」
마지못해 스크린을 살폈다. 현 위치로부터 15km 떨어진 곳에 병원 건물이 서 있었으나 곧바로 믿기 어려웠다.

「그다음은 네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

그는 되는 대로 운전했지만 주변에 다른 차량이라고는 한 대도 없고, 길은 계속 직선이었기에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지평선을 향해 달렸다. 소실점은 아주 멀리 있었고 이름 모를 나무가 듬성듬성 선 길은 무한대로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여태 목격한 세상은 모두 거짓이며 이 적갈색 흙먼지가 날리는 도로만이, 세계의 본질인 듯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시릴, 왜 다시 만나러 온 거야?」
「만나러 온 건…너잖아.」
「내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알아낸 거지?」
「스스로 떠올려내 봐. 너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나를 만나기 전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어?」

Where dreams go to die…….

라디오 스피커에서 줄곧 같은 노래가 반복되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둘러싼 순환들. 그중 하나에서는 벗어나고 싶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상대는 제지하지 않았다. 이어서 엔진음과 바람 소리, 타이어가 아스팔트에 마찰하는 소음, 미약한 숨소리만이 남았을 때.

나는 충동적으로 운전대를 빼앗듯 움켜쥐었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가드레일을 반쯤 나가떨어지게 만든 차체는 해안가 절벽에 멈춰 섰다. 파도 소리가 귀에 바짝 울렸다.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여태 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메마른 땅 위를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른 세계에 들어서듯 장면이 전환되었다.

「대체 뭐가 불만이야? 너를 도와주겠다는데. 병원에 데려다주고, 원래 삶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너, 지금 그게 문제가…….」

영화의 연출처럼 카메라가 시계 방향으로 한 번 도는 것처럼, 박살 난 구조물 아래로 기울어지는 차에 탄 사람이 뱉을 말은 아니었다. 운전대에서 손을 놓고, 태연히 시트에 기대는 행동이라거나, 그런 와중에도 상처에 대해 걱정하며 이쪽을 바라보는 태도가, 모든 것이 현실과는 지나치게 동떨어져 있어서 마치 깨지 않는 악몽 속에서 발버둥 치는 감각과 닮아 있다고.

천천히, 세계의 중심이 기울어진다. 영화의 연출처럼 카메라가 시계 방향으로 한 번 도는 것처럼, 두 사람의 숨이 검은 물결 아래 잠기기 전

「돌아보면 안 돼.」

나를 향해 돌아보며, 그가 말했다.
수면의 파문이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단테, 돌아보지 마….」 손가락이 모조리 잘려 나간 손이, 물 위로 솟구쳤다. 문득, 이런 상황에서도, 태어나기 전부터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으로 나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돼. 남자는 약속을 어겼고, 결국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여덟 조각으로 찢긴 몸 중에서 목만이 노래를 부르며 바다 위를 떠돌아다녔다. 소름 끼치는 감각이 전신을 기어오르고 천천히 손발이 굳고 눈이 마주쳤을 때, 의식의 가장 깊은 곳으로
추락하는 감각이…….



3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는 것과 같은 충격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도심에 접어들고 있었다. 무릎 위에 놓여 있던 편의점 비닐봉지가 떨어지고, 그 속에서 물병 하나와 붕대, 반창고 따위가 쏟아져 바닥을 굴렀다. 숨을 몰아쉬며, 운전석 쪽을 〈돌아보았지만〉, 시릴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운전대를 붙잡고 정면을 응시했다.
얼어붙은 공기. 하늘을 찌를 듯 쌓아 올려진 고층 건물들 위로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이 반짝였다. 넓은 도로 양옆으로 다른 사람들의 차가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도 인기척이라곤 느낄 수 없었다. 거대한 무대 세트에 대본 없이 입장한 기분이 들었다. 여긴 어디지, 시외인가? 영국이 맞긴 해? 그 생각을 읽은 듯, 대답하듯 상대는 대교 위로 차를 몰았다. 밀레니엄 교 아래, 연분홍빛 노을을 머금고 일렁이는 강물의 향기.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자신의 몸을 살핀다. 어디 하나 젖은 구석은 없다.

「나쁜 꿈이라도 꿨어?」
「……아마도.」
「어떤 느낌이었는데?」
「차 사고가 나서, 바다에 떨어지는 꿈.」
「응.」
「네가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는 드물게 재촉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전화 좀 빌려줘.」
「병원에 가서 하면 되잖아.」

 어디선가 시계탑의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익숙한 음색으로 한 번, 두 번,

「차 세워.」
「그럴 시간 없어.」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셋, 넷…마음속으로 헤아리다가, 다섯 번째. 특수 화물을 실은 대형 트럭이 바짝 붙어 차선을 변경할 때, 나는 상대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마지못해 속력을 줄이고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여섯, 마지막으로 일곱 번에서 종울림과 함께 차체가 멈췄다. 나는 어떠한 예고 없이, 문도 열지 않은 채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빌딩과 빌딩 사이 크레바스처럼 내려앉은 긴 골목을 내달렸다. 등 뒤에서 그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폐포가 터져, 입에 피 맛이 돌 때까지 복잡한 길을 헤매며 나아갔다. 대로로 나가면 도움을 청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줄곧 어둡고 비좁은 길이 이어졌다. 더는 쫓는 기색이 없었다. 귓가에 울리는 것은 자신의 날카로운 숨소리. 벌어진 상처에서 떨어진 핏물이 고여, 질척거리는 구두 굽 소리……배관과 전깃줄이 덕지덕지 연결된 벽을 짚고 멈춰 섰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멈췄다. 뱉어내기 전,

뜨거운 바람이 훅 끼쳤다.

머리카락이 잠깐 흩날리지만, 주변에 떨어진 종잇조각이나 늘어진 전선 따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 번째, 익숙해진 감각이 혈관을 타고 흐른다. 지나쳐온 길 저편에서 짓씹는 소리가 들려온다.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잘게 으깨며, 짓밟고, 강한 힘으로 문지르거나 밀며 억지로 나아가는 음색. 엉켜 있던 뼈들이 부러지고, 사방에 튀며 금속이나 배관을 건드려 발생하는 청아한 울림이 천천히, 천천히 다가와 그림자마저 좀먹기 시작한다. 그 사람은 이곳에 없지만, 환청이라도 듣는 것 같았다. 

「돌아보면 안 돼.」
그러니까 이건 아주 익숙한 이야기라고…….

더는 아프게 느껴지지 않는 다리를 끌며, 나는 돌아보았다. 일정량의 간격을 예상했지만, 그것은 코앞까지 와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죽은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이루는 구성원은 무엇 하나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채였다.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엉겨 붙은 핏줄과 관절 위 새로운 살이 돋아났지만, 흘러넘치는 뇌수들 간에 완전한 화합을 이루지 못해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닿은 살점이 찢겨나갔다. 턱관절 아래가 없는 얼굴들이 형성한 거대한 입 안, 미처 소화되지 못한 시체가 두 구 정도 담겨 있다. 눈을 치켜뜨고 죽은 자의 시신이 정체 모를 검은 액체 사이서 부글부글 녹아내렸다. 

두렵다거나, 도망쳐야 한다거나, 죽고 싶지 않다거나 생각할 틈 없이, 목 아래를 물어뜯기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점멸하고



4

나는 누군가의 병상에 서 있었다. 

「얼마 버틸 수 없을 거라 했지만,」

현실을 잊고, 꿈속으로 도망치고자 약물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섬나신 주사 한 번으로 싫은 일은 전부 잊고, 각자의 환상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전단이 전염병처럼 사회를 좀먹었다. 

「그래도, 그전에라도 깨어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오랜만에 조우한 친구 역시, 파리한 낯으로 그런 꿈속에 빠져 있었다. 좁은 창에 걸린 커튼이 흔들린다. 흰 천 위로 나뭇잎 그림자가 레이스처럼 걸린다. 다신 만나지 말자는 이야기를 남긴 채, 그는 종적을 감췄다. 어떤 연락도 없이 이 년이 흘렀을 때 돌연 시외 대학병원 주소지만이 적힌 메시지가 도착했다. 관계를 무겁게 여긴 적 없었기에 오히려, 영영 사라진다고 받아들이자 곤혹스러워졌다. 걱정과 슬픔보다는 불안. 「약물 중독이라고….」 로비에서 그의 가족과 주고받은 대화를 떠올려낸다.

탁자에 놓인 푸른색 표지의 시집. 펼쳐진 페이지를 읽는다. 때로는 에우리디케가 앞서가고, 때로는 오르페우스가 앞서가며 뒤돌아보았다. 이젠 뒤돌아보아도 그를 잃지 않을 테니. 버드나무를 스치는 바람이 길게 파도 소리를 내고 물러난다. 갈라진 입술 밖으로 숨이 끊어질 듯 흐르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옆에 놓여 있던 패시브 장치로 손을 뻗었다. 그를 깨울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스스로 지나치게 냉정하다고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이나, 다른 사람을 몇 번 거쳐 자신에게 연락이 왔다면……잠자리에 들어 보는 꿈은 고사하고, 우리는 현실의 희망조차 논해본 적 없었으니까.

네가 어떤 세계를 바라는지, 왜 그곳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하는지 무슨 수로 알겠어.

그런데도 수긍한 듯 정맥에 바늘을 찔러넣고, 드림 머신이 이끄는 거대한 꿈속으로 빠져드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또 다른 자신이 있다. 안개가 걷히듯 회상은 사라진다. 


병실, 흰 커튼 사이,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이 제 목을 더듬는다. 뭉툭한 이빨에 동맥이 끊어지고, 저항하는 손가락은 얄팍한 나뭇가지마냥 꺾여버리는 감촉. 모조리 흩어질 때까지 그는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선다. 다리는 상처 없이 말끔했다. 침대로 시선을 돌린다. 〈방금까지〉 차를 운전하고, 자신과 말다툼을 벌인 사람보다는 좀 더 피로하고, 나이 들어 보였다. 사이드 테이블에는 드림 머신 대신, 한 장의 편지와 페이퍼나이프가 놓였다. 그는 나이프를 향해 손을 뻗다가, 돌연 떠올려낸 듯 외투 주머니에서 작은 팽이를 꺼낸다. 무게중심을 잡고 탁자 위에서 돌린다. 희멀건 벽지 위 걸린 시계가 오 분을 넘게 표시할 때까지 그것이 멈추기를 기다리지만, 팽이는 계속 돌아갈 뿐이다.

편지를 펼쳐 읽는다. 그곳에는 시릴의 필체로,

「사용해」
라는 단어가 쓰여 있다.



5

칼날을 심장에 내리꽂았다.



6

「조금이라도 행복한 환상을 보고 있을 줄 알았어.」

흰 시트가 검붉게 물든다. 손가락 사이 여전히 타인의 살을 찢고 근육을 가르는 감각이 남아 있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모든 의문이 풀리지는 않았으나, 꿈의 주인이 죽는다면 이 지긋지긋한 세계도 무너지겠지. 깨어나고 싶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장치를 준비할 이유도 없을 것 아냐. 뱉었을지, 목 안으로 삼켰을지 알 수 없는 말들.  칼을 바닥에 떨어트린다. 금빛 손잡이에는 밀랍으로 이어 붙인 날개가 그려져 있다. 핏물이 튀어 엉망이 된 깃털의 문양은 마치 태양열에 녹아내리는 형상 같다고, 그는 생각한다. 
왜 그런 선택을 했지?
무엇도 네 닻이 되어주지 않았어? 거부한 건 네 자신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여름 햇빛이 참극 위로 따갑게 내리쬔다. 떨어진 혈흔이 타일 틈에 스며들어, 광원을 받아 번뜩인다. 잠자코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숨을 죽이고, 눈을 감았다가, 몇 걸음을 옮기고 다시 제자리.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문득, 여전히 미동 없이 회전하는 팽이에 시선이 닿았다.

노크 소리가 울린다. 경쾌하게 두 번. 

그리고 다음 순간
시릴 메이스필드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7

커튼이 흔들린다. 흰 천 위로 나뭇잎 그림자가 레이스처럼 늘어진다. 탁자에 놓인 프리지아 꽃다발 사이에서, 건강하길 바란다는 문구가 인쇄된 카드가 흘러내린다. 버드나무를 스치는 바람이 파도 소리를 낸다. 근처에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 는 생각했다. 사방이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넓은 방 중앙의 작은 침대, 나는 흰 시트에 모로 누워 눈을 뜨지도 않고 자신을 감싼 풍경을 둘러보았다. 무언가를 보겠다고 마음속으로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이미지가 뇌리에 다가와 박혔다. 벽 바깥은 온실이었다. 아름다운 사물들을 외면한 채,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눈으로 가장 먼저 살핀 것은 침대 앞 의자에 걸터앉은 타인의 모습이었다. 마음을 잃고 꿈에 빠져 누워 있던 사람의 얼굴.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의……. 나는, 자신의 시체를 절망스럽게 내려다보던 그의 시선을 기억해냈다. 열린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이 없는 누군가의 팔. 쇳소리와, 또 한 번의 약속을 어기고 돌아본 끝의 절망….
모든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죽어서도〉 깨어나지 않았고, 우리는 결국 가장 처음의 장소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어떻게든 되어버리라는 심정이었다. 시릴은 장미 화분 하나를 의미 없이 매만지다, 모든 것에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산책 좀 할래?」


이전 지나쳤던, 미로처럼 얽힌 복도와 수십 개의 문을 예상했지만, 온실의 문을 열자마자 바깥이었다. 우리는 해안 절벽 아래 백사장을 따라 걸었다. 하늘 가득, 수평선을 덮어버릴 기세로 눈이 내렸다. 이상하게도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단테, 만나러 온 건……너잖아.」
「그렇지?」 한참 걸음을 옮겼을 때 그가 되물었다.

「후회 중이야.」
「알아.」
「적당히 하고 깨어나. 솔직히…나는 너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 네 가족의 기대에 부응할 자신도, 이유도 없고. 나 혼자 깨어나서, 네가 이곳에서 마냥 불행해 보이진 않았다고 전해 주는 게 최선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만약,」

몇 발짝 앞서 걷던 상대는, 돌아보지 않은 채 멈춰 섰다. 「만약 네가 아주 나쁜 죄를 지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은 채 관리해야 되고, 그들의 생명 유지를 위해 소모하는 비용을 최대한 절감시키고 싶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
바닥을 긁듯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질문의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곤히 잠들어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냈다.
「중독 상태에 빠져 있도록 만들겠지….」
「네게 찾아가기 하루 전, 누군가에게 그런 감옥을 지으라는 말을 들었어. 수감자들을 위한 정신적 새장을 만든 다음, 출구는 봉쇄해 달라고.」
「거절할 수는 없었어?」
「그럴 수 있으면 좋았겠지……수백 명을 심층심리에 구속하는 미로를 설계하는 일은 쉽지 않아. 그래서」


그래서, 그는 아주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만 했다. 드림머신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무의식이 겹쳐지는 공간, 림보까지 향해 설계를 시작했다. 죽지 않고서는 돌아갈 수 없는, 무한한 경계에서 만들어진 감옥. 갇힌 자들의 의식은 누더기가 되어, 그의 투사체와 천천히 하나로 얽히더니 곧 우리가 목격한 괴물처럼 변질되었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서 수백 년 이상. 그 자신마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추락했는지 잊어갈 때….

「도울 수 있으리라고 여기지 않은 주제에….」 그는 비웃음을 흘렸다.
「…네게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설명은 밖에서도 할 수 있잖아. 나이프는 어디 뒀어? 없다면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죽어. 죽고, 깨어나서, 네가 얼마나 허황된 세계에 빠져 있었는지 돌아보라고.」
「칼은 네가 사용하라고 놓아둔 게 맞아. 〈그것〉에 잡아먹히면 돌아갈 수 없게 되고, 너무 깊게 파고들어도 현실을 잊어버리게 되니까. 넌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더라. 유감스럽지만 같은 방법은 이제 사용할 수 없거든.」
「사용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겠지. 왜 처음부터 정확히 설명하지 않았어?」
「너에게만은, 내가 이곳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어.」
「적어도 수치스러운 줄은 알아서 다행이네.」
「그렇게 여길 것 같아서.」
「일어나서 죗값을 치를 마음은 없고?」
「…이건, 그렇게 나쁜 일일까? 나는 그들을 위한 감옥을 만들었지만, 실질적인 속박은 각 개인의 육체라고 생각해. 그 속에 영혼을 가두고, 아무도 상처입히지 않고 살아가는 건, 사실 고귀한 인생이 아닐까?」
「시릴, 이런 건…….」

검은 물결이 발목을 감싼다.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어.」

상대는 돌아선다. 「알아.」 울 것 같은 표정을 마주하지만 다시 파도가 밀려올 때쯤이면 사라져 있다. 불현듯 심한 갈증을 느꼈다. 사방에 널린 것이 물이었고, 원한다면 얼마든 들이킬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여기 있다가는 죽음마저 느낄 수 없게 될 거야. 정체되더라도 현실에서 멈춰야만 해.」 동시에 시집의 문장을 회상한다. 그들은 번갈아 앞서가거나 뒤돌아보았다…. 왜냐하면 이제는……. 「미안해, 하지만 안 돼.」

「네가 보고 있는 건, 이미 죽은 사람의 꿈이니까」

말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는 대화라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그와 함께 있으면 종종 체감했다. 시릴은 왼쪽 장갑을 벗었다. 새끼손가락에 걸친 반지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바다 먼 곳으로 던져버렸다. 이어서 환히 웃는다. 
이젠 뒤돌아보아도 그를 잃지 않을 테니,

「우리는 너무 높게 날았어. 그래서 떨어지고 만 거야.」